이재용 감독의 영화 <여배우들>(2009년)은 ‘여배우’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다양한 함의를 곱씹게 한 작품이었다. 각 세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들이 모인 화보 촬영장을 무대로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카메라는 대중이 때로는 동경하고 궁금해하고 때로는 질투하고 함부로 재단하는 여배우로 살아가는 여자들의 삶의 한 결을 포착했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원래 녹록하지 않다. 여배우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당대의 아이콘이라는 영광스런 왕관을 쓴 여배우들은 숙명적으로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여배우는 카메라 안에서는 나이와 외모는 물론 제한된 캐릭터와 서사와 겨뤄야 하고, 카메라 밖에서는 무책임한 뜬소문과 억측과 뒷말을 견뎌야 한다. 그래서 여배우라는 화려한 불꽃은 때로 너무 일찍 사위기도 한다. 하지만 또 어떤 여배우들은 이 살벌하고 무신경한 말과 시선 속에서도 살아남거나 부활한다.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당연하다는 듯 웃는 여배우의 얼굴은 아름답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스포트라이트를 각자의 방식으로 다시 재탈환한 여배우의 얼굴은 멋지다. 그래서 지금 전지현과 이연희가, 김희애와 이미연이 더욱 반갑다.
요즘 전지현을 보는 것이 즐겁다. SBS <별에서 온 그대>에서 전지현이 연기하는 천송이는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캐릭터가 본디 갖고 있는 매력과 전지현의 활기가 만나 기분 좋은 긴장감이 화면을 꽉 채운다. 김수현이 연기하는 도민준과 주고받는 로맨스의 케미스트리 못지 않게 전지현 표 천송이의 원맨쇼가 흐뭇한 미소를 부르고 마음을 간질인다. ‘모카’ 문익점 선생을 칭송하는 무식함에 이를 숨길 줄도 모르는 허당에 저 잘난 맛에 나대는 이 여자가 정말 귀엽다. 지난 11회에서 도민준에게 고백하고 차인 뒤 천송이가 벌인 일련의 ‘쌩쇼’는 명장면의 향연이었다. 화면 안에서 거침없이, 자유롭게 활보하는 전지현을 보며 그녀를 당대의 아이콘에 등극시킨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의 전지현은 그 때 그 시절보다 더 예쁘고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다. ‘그’ 전지현이 돌아왔다. 그것도 파워 업, 레벨 업 해서 돌아왔다. 영화 <도둑들>의 예니콜은 맞춤 전투복이었고, 영화 <베를린>의 련정희가 보여준 스산한 표정은 새로 장착한 무기였다. 전지현은 어째서 이렇게 더 강력해져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일을 하면서 꽤 많은 여배우들을 만나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지현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사람 중 한 명이다. <도둑들>의 개봉 이후 ‘전지현의 귀환’이 수 많은 기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시기였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전지현은 왜 그녀가 ‘그’ 전지현인지 여실히 느끼게 했다. 당당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여유롭지만 거만하지 않고, 무엇보다 자신이 가진 것과 갖지 않은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멋진 여인’이었다. 그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간 전지현의 부진이 비단 그녀의 책임만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이 배우의 에너지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 한 감독과 작가들에게도 얼마간의 책임이 있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지금 <별에서 온 그대>의 박지은 작가와 장태유 감독과 전지현의 조우가 나이스 타이밍, 나이스 샷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천송이는 실제 전지현이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강하지만 사랑스러운 에너지가 최적의 형태로 발휘되는 인물이다. <엽기적인 그녀>의 ‘그녀’만큼 거침없고 불가해한 성격에서 비롯되는 매력은 기본이다. 특유의 리듬감과 쫄깃한 말맛을 살린 박지은 작가의 대사와 “내가 천송이야~”가 “내가 (바로 그) 전지현이야~”로 들리게 하는, 즉 압도적인 존재감을 여실히 담아내는 장태유 감독의 연출이 힘을 더했다. 무엇보다 애써 드러낼 필요도 불필요한 겸양으로 감출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인간 전지현의 캐릭터가 천송이와 만나는 지점을 배우 전지현이 정확하게 인지하고 명석하게 활용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다시 돌아온, 전지현의 시대가 더욱 궁금한 이유다.
흥미롭게도 같은 시기에 새삼 그 매력을 다시 곱씹게 되는 여배우가 또 한 명 있다. MBC <미스코리아>로 전지현과 맞붙은 이연희다. 인근 남자 고등학생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동네 퀸카’에서 때로는 비루하고 또 비굴한 ‘엘리베이터 걸’을 거쳐, ‘미스코리아 서울 진’을 꿈꾸는 오지영. 이 비범한 여자를 연기하는 이연희는 좀처럼 깨지지 않은 것 같던 알을 드디어 깨고 나오고 있는 듯하다. 이연희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미모로 아이콘이 되었지만, 미모만큼 설득력을 갖진 못한 미숙한 연기력에 대한 비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전지현이 ‘그’ 전지현이어서 겪었던 과정을 ‘그’ 이연희도 고스란히 겪고 있었다. 더욱이 이연희는 딱히 대표작이라고 내세울만한 작품도 없는데다 더 이상 신인이라 그렇지 라고 감싸주기 어려울 만큼 경력이 쌓여가는데도 좀처럼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때 이연희는 MBC <구가의 서> 윤서화를 만났다. 그리고 <미스코리아>로 연이어 영리한 선택, 좋은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미스코리아>라는 제목을 내건 드라마의 타이틀 롤, 오지영은 예쁜 여배우들이 연기 변신이라는 이름 아래 괜히 안 예쁜 척 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이연희가 영리한 선택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예쁘지만 ‘싼 티’ 나는 여자, 수영복 차림으로 무대에 서야 하는 미스코리아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캐릭터기도 하다. 이미지의 연장인 동시에 이미지 변신이기도 한 이 모순적인 도전을 현실감 있는 여성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그리는데 장기가 있는 서숙향 작가와 권석장 감독과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이 지금 이연희의 도약에 발 구름판이 되어준다. 아직 모두의 색안경을 벗기기엔 다소 부족하고 미숙하지만, 드디어 찾은 돌파구를 향해 힘껏 달려가고 있는 이연희를 보는 게 즐겁다.
한편, 예능을 통해 내공과 반전을 보여준 여배우들도 있다. tvN <꽃보다 누나>에 김희애와 이미연이 출연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가장 먼저 품은 기대는 대조적인 이미지의 두 사람이 한 프레임에 잡혔을 때 발생할 묘한 긴장감이었다. 그런데 정작 방송을 보고 얻은 것은 사려 깊은 김희애와 마음의 속살이 보드라운 이미연에 대한 호감이다. 사십 대가 된 두 여배우는 유난히 나이에 민감한 이 땅에서 결코 핫한 이름은 아니었다. 최근의 김희애는 세련되고 우아한, 그래서 부럽지만 좀 얄밉기도 한 옆집 여자의 이미지가 강했다. 나이가 무색한 그녀의 외모는 오랫동안 화장품 광고 모델로 활동할 수 있는 힘이었지만 그 광고 특유의 컨셉은 때로 그녀를 놀리는 소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희애가 <꽃보다 누나>에서 보여준 사려 깊은 마음 씀씀이와 이미지를 배반하는 소탈함은 그녀의 우월함을 시기하기보다 기꺼운 마음으로 인정하게 했다. 한 때 ‘여자 최민수’라는 수식어로 불렸을 만큼 ‘기 센 언니’ 이미지가 강한 이미연의 경우, 두터운 외투 같은 말투로 감싸고 있지만 그 속에는 한없이 여리고 보드라운 마음이 숨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꽃보다 누나>는 사람들에게 김희애를 납득시키고 이미연을 이해시켰다.
언제나 요정이고 여신일 것 같던 그녀들도 나이를 먹고, 만만치 않은 장벽에 부딪히며, 한계와도 직면한다. 그 때, ‘여’배우지만 그 전에 여’배우’인만큼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정공법으로 재도약의 기회를 손에 쥘 수도 있고, ‘리얼리티’가 대세인 만큼 예능을 통해 적당히 사생활과 민낯을 노출하는 방식으로 반전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대체불가능 한 자신만의 강점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어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송혜교는 KBS <그들이 사는 세상>이나 SBS <그 겨울, 바람이 분다>와 같은 작품에서 기존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도전을 했지만, 탁월한 외모라는 장점을 굳이 버리지 않으면서 연기의 보폭을 넓히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송혜교 이전에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KBS <굿바이 솔로>를 통해 반전의 기회를 마련했던 김민희 역시, 영화 <화차>와 <연애의 온도>를 거치며 특유의 날 선 예민함과 개성은 유지한 채 조금씩 더 넓고 깊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름에 신뢰감을 더해가고 있다. 역시 삼십대 여배우가 된 신민아가 영화 <경주>를 통해 ‘만년 유망주’ 꼬리표를 드디어 떼낼 수 있을까 궁금해지는 것도 이들 선배 여배우들이 보여준 행보가 있기 때문이다. 전지현이 돌아왔고, 이연희가 도약하고 있다. CF 속 ‘15초의 요정’이기 이전에 배우인 그녀들이 왕관의 무게를 이겨내고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간다. 더 많은 여배우들이 더 씩씩하게, 더 아름답게, 더 행복하게 그 길을 함께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