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버스나 지하철에서 이상형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다들 손에 쥔 스마트폰을 보느라 고개를 숙인 탓에 옆에 이상형이 있다 해도 알아차릴 수 없어서다. 우스갯소리처럼 시작했지만 ‘모바일’이 시대의 화두가 된 지금, 예전과 달라진 풍경들이 많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출근길의 친구이자 강력한 광고 매체 중 하나였던 무가지가 하나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더니 이제 지하철에서 옆 사람이 펼친 무가지를 어깨너머로 흘끗 거리는 재미도 사라졌다.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자기 손에 든 스마트폰 속 작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 사람들이 집중해서 보고 있는 것은 온라인 기사나 웹툰, SNS의 타임라인이나 메시지다. 그리고 10분 남짓의 짧은 호흡으로 만들어진 모바일 드라마와 영화가 요즘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소위 ‘스낵 컬쳐(Snack Culture)’라 불리는 것들이다. 부담 없이 즐기는 스낵처럼 짧은 시간에 간편하게 콘텐츠를 즐기는 문화라는 의미다. 이 ‘스낵 컬쳐’가 2013년부터 회자되기 시작하더니 2014년 새해, 콘텐츠 산업의 중요한 키워드로 떠올랐다.
웹과 모바일을 기반으로 제작되고 소비되는 ‘스낵 컬쳐’ 영상 콘텐츠를 말할 때,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모바일 무비 <미생>이다. 인기 웹툰 <미생>의 프리퀄 영화로 지난해 5월 포털 사이트 다음(Daum)을 통해 공개되었다. 장그래를 비롯해 원작 속 등장인물 각각이 주인공인 프리퀄을 10분 내외의 단편 영화로 구성했다. 아이돌 그룹 제국의 아이들 멤버인 임시완이 분한 장그래가 한국기원 연구생을 그만둔 뒤 무기력한 시간을 버티는 모습은 물론, 군인 아버지를 따라 잦은 전학을 해야 했던 안영이(김보미)의 어린 시절 등 원작에서 보지 못한 인물들의 전사(前事)가 색다른 재미를 주었다. 짧은 러닝 타임 속에 반전의 묘미까지 담아낸 오차장(조희봉)이나 김동식(문세윤) 편은 원작의 팬이 아니라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스토리라인으로 눈길을 끌었다. 모바일 무비 <미생>은 다음에 공개된 지 3주 만에 150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모바일 기반 영상 콘텐츠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다음은 <미생>에 이어 2013년 11월, 12부작 모바일 드라마 <러브포텐 – 순정의 시대>(이하 <러브포텐>)도 선보였다. 다음 스토리볼과 TV팟을 통해 공개된 <러브포텐>은 웹툰 <공대생의 사랑 이야기>를 원작으로 삼은 로맨틱 코미디로 아이돌 그룹 인피니트의 이성열과 포미닛의 남지현이 주연을 맡았다. <러브포텐>은 초등학생 시절 무려 열다섯 번의 고백에 실패한 뒤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거부한 ‘모태솔로’ 공대생 정기억(이성열)과 무용과 ‘퀸카’ 윤민아(남지현)의 좌충우돌 로맨스를 코미디와 버무려 눈길을 끌었다. ‘찌질’한 남자가 ‘공주님’ 같은 여자에게 한눈에 반해 순정을 바치는 이야기는 순정만화 로맨스의 공식을 따르지만, 과장된 연출로 개성을 살린 캐릭터 플레이와 말맛이 살아 있는 대사가 만들어내는 재기발랄함이 독특한 재미를 선사했다. <러브포텐>의 이런 연출은 상대적으로 시각적 스펙터클을 선사하기 어려운 작은 화면과 10분 내외라는 짧은 러닝 타임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미생>의 감독들 역시 정보 전달을 위해 클로즈업을 자주 사용하거나 밝은 곳에서 보는 모바일 무비의 특성상 조명을 최대한 밝게 쓰고, 길을 걸어가면서도 볼 수 있도록 형식에 신경을 썼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스낵 컬쳐’에는 기존 드라마나 영화와는 다른 특수한 환경에 맞는 나름의 문법과 기술이 요구된다.
한편, CJ E&M이 회당 15분, 총 4편으로 제작한 모바일 드라마 <스무살 20’s>(이하 <스무살>) 역시 순정만화 공식을 따르며 로맨스에 대한 판타지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러브포텐>과 정서적으로 닮아 있다. 하지만 코미디의 색채가 강한 <러브포텐>과 달리 ‘샤방’하고 예쁜 화면으로 눈길을 끄는 <스무살>은 10~20대 타깃에 최적화된 로맨스 드라마에 노하우를 갖고 있는 CJ E&M의 내공과 영리함이 돋보였다. 신인 이다인이 연기하는 주인공 혜림은 로맨틱한 연애에 환상을 품고 있는 스무살 대학생이다. 하지만 혜림은 짝사랑 선배의 예상하지 못한 모습에 실연의 충격을 겪고, 그 즈음 중학교 동창이자 첫키스 상대였지만 지금은 인기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된 이기광과 재회한다. 아이돌 그룹 비스트의 이기광이 극 중에서 실제 자신을 연기하는 점이 관전 포인트 중 하나인 <스무살>은 인기 아이돌과 평범한 대학생의 연애라는 소재에서 알 수 있듯, 순정만화나 인터넷 소설 식 청춘 로맨스 판타지를 비교적 정공법으로 다룬다.
SNS를 통해 입소문을 탄 6부작 웹 드라마 <출출한 여자>는 ‘스낵 컬쳐’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콘텐츠로 꼽을 만하다. ‘공감백배 먹방무비’라는 수식어로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출출한 여자>는 오랜 연애를 끝낸 30대 여자 제갈재영이 싱글 라이프의 외로움과 사회생활에서 겪는 스트레스로 ‘출출한’ 몸과 마음을 간단하지만 맛깔 나는 요리로 달래는 이야기다. <출출한 여자>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의 윤성호 감독, <힘내세요. 병헌 씨>의 이병헌 감독 등 독립영화계의 재담꾼들이 연출을 맡고, 역시 다양한 독립영화에서 가감 없고 거침없는 연기로 자신의 색깔을 보여준 박희본이 주연을 맡았다. <출출한 여자> 역시 소수의 출연진과 간소한 세트를 효율적으로 운용하며 모바일 영상 콘텐츠의 정체성을 실험한다. 특히 음식이 중요한 소재인 <출출한 여자>의 필살기는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생활형 먹방’과 간편 요리 레시피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보다 ‘스낵 컬쳐’ 붐이 먼저 시작된 일본의 드라마 <하나씨의 간단 요리>나 <고독한 미식가> 등 <출출한 여자>가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들이 여기저기서 언급되기도 했다. 주인공 캐릭터만 해도 일본 만화가 마스다 미리의 ‘수짱 시리즈’부터 국내에서는 멀리는 MBC <내 이름은 김삼순>, 가까이는 tvN <막돼먹은 영애씨> 시리즈까지 30대 싱글 여성을 다룬 작품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 때문에 “지금 남친은 나를 재우고 헤어진 남친은 나를 깨운다”를 비롯해 허허실실 폐부를 찌르는 대사와 일상에 발붙이고 살아있는 캐릭터, ‘웃픈’ 상황 속에 담아낸 발군의 코미디 같은 <출출한 여자>의 장점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인식과 일상의 풍경을 바꾼다. 스마트폰과 모바일 환경의 보편화가 가져온 변화는 광범위하고 혁신적이며 현재진행형이다. 기술 환경의 변화에 특히 민감한 콘텐츠 산업의 경우 새로운 미디어와 그로부터 파생된 대중의 새로운 욕구를 파악하고 이에 조우하는 콘텐츠를 발굴하고 만들어내는 것이 숙명과도 같다. 그래서 모바일 시대에 영화와 드라마는 비단 같은 영화관과 TV 속 경쟁자만이 아니라 웹툰과 게임과 같은 새로운 경쟁자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예술인과 업계, 학계, 언론, 홍보 등 분야별 전문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2014 문화예술 트렌드 분석 및 전망’에서도 ‘스낵 컬쳐’의 유행이 10대 흐름 중 하나로 거론되었다. 앞서 언급한 ‘스낵 컬처’의 사례들 대부분이 다음이나 네이버 캐스트, 카카오페이지 등을 통해 독점 제공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새로운 성장 동력에 목마른 포털과 모바일 서비스 기업들의 ‘스낵 컬쳐’에 대한 투자와 관심이 지속될 것 역시 쉽게 전망할 수 있다.
한편, ‘스낵 컬쳐’의 유행을 두고 허기진 정서를 채우기 위한 퇴행의 한 단면이라고 분석한 이도 있다. (주창윤, <허기사회>, 2013) 지금 우리에게는 단기적으로는 출퇴근과 등하교 시간을 버티게 해주고, 장기적으로는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해줄 ‘재미있는 것들’이 필요하다. 동시에 우리가 이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이다. 10분에서 15분의 짧은 시간 동안 누군가는 웹툰을 보고 누군가는 게임을 하고 누군가는 SNS 메시지를 보내고 또 누군가는 짧은 영상을 본다. 이들 ‘스낵 컬쳐’ 사이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핵심 전략은 짧고 간편한 것, 그리고 당연하게도 새롭고 재미있는 것이다. 전자는 ‘모바일 핏(Mobile Fit)’이 키워드고 후자는 모든 콘텐츠의 금과옥조다. 한없이 광활한 동시에 한없이 개인적인 모바일 세상을 무대로 삼은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소비자로서는? 어쨌든 세상에 재밌는 게 많아지면 즐겁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