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세 노인의 묵직한 도약. 언뜻 호응이 맞지 않는 듯 보이는 이 수식이 올해 70회를 맞은 베니스 국제 영화제(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이하 베니스 영화제)를 설명한다. 한동안 정숙하거나 고루하다고 여겨졌던 베니스 영화제가 젊은 열기와 감수성을 껴안은 다종다양한 영화들과 함께 칠십 번째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8월 28일부터 9월 7일까지 이탈리아의 베니스 리도 섬에서 열린 베니스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는 1932년에 시작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이기도 하다. 여름의 마지막과 시작되는 가을이 오버랩 되는 시기에 개최되는 베니스 영화제는 오랫동안 예술영화의 성지로 이름을 드높였다. 하지만 마켓과 함께 영향력을 넓힌 칸 영화제나 상대적으로 할리우드 영화에 문턱을 낮았던 베를린 영화제와 비교해 다소 고루하고 엄숙한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 더욱이 비슷한 시기에 개최되는 토론토 영화제나 몬트리올 영화제 등 북미 지역 영화제의 위상이 급속도로 높아지면서 소위 ‘핫’한 프로그램 구성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노인의 저력을 무시하지 말 것. 영어권 작품을 대거 초청하고 다양한 화제작을 발 빠르게 선점한 올해의 베니스 영화제는 멕시코 감독 알폰소 쿠아론의 3D 영화 <그래비티>를 개막작으로, 브라질 감독 티에리 라고베르트의 다큐멘터리 <아마조니아>를 폐막작으로 선정했다. 1983년의 제 40회 영화제에 이어 이탈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다시 한 번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에 위촉되었고, 이탈리아 모델 겸 배우 에바 리코보노가 개막식 사회를 맡았다. 한편, <프렌치 커넥션>과 <엑소시스트>의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이 생애공로상인 명예 황금사자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조지 클루니와 산드라 블록의 만남으로 눈길을 끈 <그래비티>를 포함해 올해 베니스 영화제 화제의 영화들을 되짚어 본다.
우주와 심연, 그 끝을 알 수 없는 고독 <그래비티>2006년 <칠드런 오브 맨> 이후 7년 만에 신작 <그래비티>를 완성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아들 조나스 쿠아론과 함께 이 영화의 각본을 썼다. 허블 우주 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 우주 탐사에 나선 대원이 인공위성 잔해와 부딪히는 불의의 사고로 인해 우주 미아가 된다. 지구로 귀환하기 위한 사투를 벌이는 메디컬 엔지니어 스톤 역을 산드라 블록이 맡았고, 베테랑 우주 비행사 맷 역을 조지 클루니가 연기했다. “한 없이 지루해 보이는 우주가 이토록 압박감을 줄지 몰랐다”는 평을 비롯해 기자와 평론가의 반응도 뜨거웠다. 국내에서는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의 감독으로 유명한 알폰소 쿠아론은 2001년 <이 투 마마>로 베니스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전작 <칠드런 오브 맨>에서도 인상 깊었던 롱 테이크로 담아낸 무한한 우주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극한의 고독과 대면하는 산드라 블록의 섬세한 연기가 호평을 받았다.
금발이 아니라도 위험해 <언더 더 스킨>“제 삶은 물론 일에 있어서 하나의 도전이었고 정말 흥미로웠어요.” <언더 더 스킨>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완벽한 미를 무기로 사람을 매혹하는 외계인 로라로 변신 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외계인이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SF 영화로, 매혹적인 여인으로 정체를 숨긴 로라는 황량한 사막이나 도로에서 히치하이커를 유혹한다. 치명적인 블론디의 매력으로 기억되는 스칼렛 요한슨이 흑발 가발을 쓰고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언더 더 스킨>은 <섹시 비스트>로 호평 받은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마이클 페이버의 원작 소설을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의 절묘한 무드 속에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감독 제임스 프랑코에게 박수를 <차일드 오브 갓>지난 2011년에도 연출작 <살(Sal)>을 들고 베니스를 찾았던 제임스 프랑코가 다시 연출과 각본을 맡은 <차일드 오브 갓>을 들고 또 한 번 베니스를 방문했다. <차일드 오브 갓>은 <더 로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코맥 매카시가 쓴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미국 테네시 주 세비어 카운티를 무대로 범죄와 타락의 나락으로 빠져가는 변태성욕자이자 연쇄살인범 레스터 발라드의 이야기를 그렸다. “매우 충실하고 적절하게 날 것의 생생함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원작에 묶여 있다”는 평가를 받은 <차이드 오브 갓>. 레스터 발라드를 연기한 스콧 헤이즈의 광기와 제임스 프랑코가 재현해낸 테네시의 풍경에 대해서는 호평이 쏟아졌다.
숨 막히게 아름답지만 지울 수 없는 논란 <바람이 분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으로 2005년 베니스 영화제 명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바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 <바람이 분다>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스튜디오 지브리가 제작한 그 어떤 작품보다 눈부시게 아름답다”, “독일의 인상파, 야수파, 사회적 실존주의 등 20~30년대 예술을 엿볼 수 있는 새로운 장면들이 눈에 띈다” 등 주요 언론들의 극찬 세례를 받았다. <바람이 분다>는 실존 인물인 호리코시 지로의 삶을 소재로 하늘을 동경한 소년과 그의 꿈을 지지한 소녀의 아름답고 가슴 아픈 로맨스를 그렸다. 하지만 전투기 설계자였던 지로가 제로센 전투기를 만들어 태평양 전쟁에 미친 영향 등 역사적 맥락이 거세된 영화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길 위에 삶이 있다 <사크로(Sacro) GRA>이탈리아 감독 지안프랑코 로시의 다큐멘터리 <사크로 GRA> 제7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차지했다. 심사위원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모든 심사위원들이 이 영화에서 시적인 힘을 느꼈다”고 말한 <사크로 GRA>는 로마의 도시외곽순환도로인 GRA 주변에서 살아가는 응급구조원, 매춘부, 어부, 공영아파트 세입자 등의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을 담아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이탈리아 영화가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것은 1998년 이후 15년 만에 처음일 뿐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황금사자상을 차지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영화제의 주인공은 당연히 세계 각국에서 초청된 수많은 영화 작품들이지만, 영화제를 바깥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순간은 카메라 플래시가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레드 카펫 무대가 아닐까. 어느 여배우가 어떤 드레스에 어떤 주얼리를 했는지, 최신 트렌드를 자기만의 매력으로 믹스매치 한 셀러브리티는 누구인지, 상대적으로 다양한 스타일링을 선보이기 어렵지만 그 제약 안에서 멋진 슈트 핏을 보여준 남자 배우는 누구인지 눈이 바빠진다. 개막작 <그래비티>로 베니스 영화제를 찾은 산드라 블록의 레드 미니멀 드레스를 시작으로 블랙 앤 화이트 드레스에 선글라스를 매치 한 캐리 멀리건 등 할리우드 톱스타와 셀러브리티의 패션 경쟁이 황금사자상 수상 경쟁만큼 치열했던 제70회 베니스 영화제.
더 붉게 빛나는 별 산드라 블록레드 카펫 위에서 가장 위험하고 또 그만큼 가장 압도적인 매력을 뽐낼 수 있는 컬러인 레드를 선택한 산드라 블록. 제이 멘델의 사이렌 레드 미니멀 드레스에 업스타일 헤어, 로저 비비에르의 블랙 스트랩 하이힐로 레드 카펫을 밟은 그녀는 하이 앤 로우 비대칭 드레스 사이로 드러나는 다리로 특유의 건강함에 우아함을 더한 스타일링을 완성했다. 튜브탑 드레스에 굳이 과한 주얼리를 매치하기보다 하프 드롭 이어링으로 심플하게 마무리한 것 역시 칭찬할 만하다.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에요 다코타 패닝스무 살 다코타 패닝이 과감한 클리비지 룩으로 레드 카펫에 나타났다. 깊게 파인 브이 커팅의 엘리 사브 네이비 롱 드레스를 입은 다코타 패닝에게서 아역 배우의 그늘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다코타 패닝은 출연작 <나이트 무브>의 포토 콜에서는 알렉산더 왕의 크림 컬러 미니 레더 드레스로 깜찍함을 과시했다. 전체적으로 미니멀한 디자인에 오버사이즈 포켓이 엣지를 더했다.
우아한 검은 인어 미아 와시코브스카미아 와시코브스카가 선택한 니나 리치의 블랙 머메이드라인 드레스는 마치 <스토커>의 인디아를 연상시키는 고혹적인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몸매가 확연히 드러내는 라인에 레이스 소재 시스루로 섹시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드레스 자락이 우아함을 가미했다. 한편 <지옥이 뭐가 나빠> 상영회 포토 콜에서는 블랙 앤 화이트의 아코디언 주름이 인상적인 프로엔자 슐러 드레스로 시선을 모았다.
단아함 위에 위트를 캐리 멀리건 화이트 피터 팬 칼라의 슬리브리스 블랙 실크 드레스를 입고 레드 카펫에 선 캐리 멀리건. 미우 미우의 드레스가 깔끔하고 단아하긴 하지만 다소 심심해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60년대 풍 토터즈 셸 프레임 선글라스와 티 스트랩 힐로 세련되게 위트와 시크를 더했다.
베르사체로 감싸 안은 볼륨감 스칼렛 요한슨베르사체의 오픈 숄더 블랙 시폰 드레스에 불가리의 화려한 주얼리를 한 스칼렛 요한슨은 이번 베니스 영화제에서 가장 인상적인 블랙 드레스일 뿐 아니라 영화제 전체적으로도 베스트 드레서로 손꼽힐만했다.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과 스팽글로 장식된 베르사체의 드레스는 스칼렛 요한슨의 우월한 라인을 매혹적으로 드러내주어 할리우드 고전 여배우의 이미지를 완성시켰다.
우아하지만 답답한 다이앤 크루거와 레베카 홀예거 르쿨트루 갈라 파티에 참석한 다이앤 크루거가 선택한 것은 알베르타 페레티의 다크 퍼플 컬러의 벨벳 드레스. 세련되고 이지적인 외모로 일상에서도 믹스 앤 매치를 적극 활용한 스타일링으로 유명한 다이앤 크루거는 공식석상에서는 특히 포멀한 드레스를 즐기는데, 이번 베니스 영화제의 경우 절제된 라인의 드레스가 다이앤 크루거의 우아함과는 잘 어울렸지만 다소 답답해 보이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프라발 구룽의 네이비 드레스를 입고 레드 카펫에 선 레베카 홀 역시 단정하지만 다소 밋밋한 모습이었다. <아이언맨 3>의 섹시한 마야 한센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어깨선을 따라 가슴 부근에서 절개된 드레스와 단정하게 동여 맨 헤어에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그 외에도‘포스트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수식이 무색하지 않도록 로샤스의 누드 핑크 벨 라인 뷔스띠에 미니 드레스를 입은 사라 가돈, 세인트 로랑의 클래식 블랙 수트로 매스큘린 룩을 선보인 지아 코폴라, 스텔라 메카트니의 점프 수트를 선택한 소피 케니디 클락, 알베르타 페레티의 블랙 앤 실버 시스루 드레스와 다미아니 주얼리로 시선을 끈 키아라 페르그니등 잇걸들의 트렌디 룩 경쟁도 치열했다. 한편, 자잘한 노출 사고가 빠질 수 없는 것이 레드 카펫이라고 하더라도 바람에 실트 드레스가 날려 하의 노출 사고를 겪은 나탈리아 보르게스에게 올해 베니스 영화제는 아쉬운 순간으로 남을 것 같다. 하지만 다음날 바로 파우스토 푸글리시의 경쾌한 하프 패턴 미니 플레어스커트와 슬리브리스 레더 톱에 주얼리로 포인트를 준 스포티 룩으로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분위기 전환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