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운동 경기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디펜딩 챔피언과 ‘듣보잡’ 신인이 맞붙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어느 쪽을 응원하는 사람인가? 지난 10월 개봉한 영화 <노브레싱>은 두 천재 수영 선수의 대결을 그렸다. 국민 남동생이라 불리는 국가대표 마린보이 우상(이종석)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평범한 체고 학생 원일(서인국)이 그들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당연하게도 둘은 일생일대의 대결을 펼치는데, 고된 훈련을 해온 건 둘 다 마찬가지건만 마음 속으로 응원한 건 원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 새로운 스타의 자리에 등극하는 다크호스를 기대하는 숨은 욕망이 크게 작용했다. 올해도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 새로운 스타들이 반짝이는 별이 되어 하늘을 수놓았다. 이 영광의 하늘은 비단 배우와 아이돌의 것만은 아니었다. 올해 발견한 그리고 오래 기억해야 할 새로운 이름의 목록에는 드마라 작가들과 영화 감독들도 있었다. 2013년의 대한민국 대중문화계는 기성 세대와 기존 체계에 도전한 ‘앙팡 테리블’의 활약으로 풍성했다. 선배의 뒤를 잇거나 그들의 자리를 빼앗기도 하는 신인은 언제나 등장하기 마련이지만, 2013년은 브라운관과 스크린 양쪽에서 줄줄이 읊어도 좋을 만큼 많은 수의 ‘수퍼 루키’가 나타났다.
얼마 전 종영한 KBS <비밀>이 화제의 중심에 있었던 건 한 자리 수에서 시작한 시청률이 수직상승을 계속 하다 마침내 동시간대 1위로 마감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시청률의 수치 자체보다 <비밀>이 꺾은 경쟁작이 SBS <상속자들>이었기 때문에 주목 받았다. <상속자들>은 김은숙 작가의 작품이다. 김은숙이 누구인가. 2000년대 이후 대한민국 드라마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 로맨틱 코미디의 대가, 시청률의 여왕이 아니던가. 그 이름값에 걸맞게 <상속자들>은 이민호, 박신혜를 필두로 김우빈, 크리스탈, 박형식, 최진혁 등 지금 이 나라에서 ‘핫’하다는 스타는 모조리 긁어 모은, 이를테면 저인망 캐스팅 라인업을 자랑했다. 그런데 마치 우사인 볼트처럼 적수가 없어 보이던 금메달 후보를 ‘듣보잡’ 다크호스가 꺾었다. 회당 5000만원 이상을 받은 스타 작가를 회당 500만원을 받는 신인 작가들이 꺾을 수 있었던 숨은 일등 공신은 KBS의 단막극 라인업인 <드라마스페셜>이다.
<비밀>은 KBS 미니시리즈 극본 공모를 통해 당선된 최호철 작가와 KBS TV 단막극 극본 공모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이미 눈 밝은 시청자의 주목을 받은 유보라 작가가 힘을 합친 작품이다. 2012에 방송된 <드라마스페셜 시즌3>의 <태권, 도를 아십니까?>, <저어새, 날아가다>, <상권이>는 학원 성장물, 문예물, 사회 부조리극 등 제각기 다른 장르지만 모두 상당한 완성도의 극본으로 평가 받았다. 이 세 작품 모두 유보라 작가가 썼다. 다양한 소재를 완성도 높은 이야기로 풀어내는 폭넓은 시야와 깊이 있는 필력을 지닌 신인 작가의 등장이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학교> 시리즈를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절절하게 풀어내며 청춘 스타들을 배출한 KBS <학교 2013>의 이현주 작가나 유난히 많았던 ’일드’ 리메이크 러쉬 속에서 유일하게 시청률과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잡은 KBS <직장의 신>의 윤난중 작가, 메디컬 드라마 불패 신화를 이어간 KBS <굿 닥터>의 박재범 작가 역시 <드라마스페셜>과 함께 성장한 작가들이다. 신인 작가의 발굴과 육성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 단막극 시스템을 통해 기존 상업 드라마의 규칙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야기를 풀어내거나 자신의 재능과 뚝심을 실험한 좋은 작가들이 미니시리즈 전장에 와서도 필력을 유감없이 뽐낸 것이다.
2000년대 이후 한류 열풍과 해외 수출 등에 맞물려 드라마 제작 환경은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 것만큼 달라졌다. 한류 스타의 몸값은 부르는 게 값이고 이는 고스란히 제작비 부담으로 전가되었고, 결국 늘 그 나물에 그 밥인 스토리, 자극의 역치를 시험하는 막장 드라마, 해외 수출용 기획 드라마 행렬이 이어지며 전반적인 질적 하락을 가져왔다. 동시에 ‘일드’나 ‘미드’ 같은 고급 콘텐츠를 경험한 시청자 수도 급증했고, 밤새 토렌토를 뒤지는 이들 중에는 드라마 작가들도 있었을 터다. 결국 기성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발상과 동시대 시청자와 호흡하는 감각을 가진 신인 작가들이 <드라마스페셜>과 같은 인큐베이팅 시스템의 도움도 얻으며 근육을 키웠고, 마침내 노쇠하고 지루한 작가들이 힘 없이 잽만 날리고 있는 링 위에 올라 시원한 어퍼컷을 날린 셈이다. 여기에 종편의 개국과 케이블의 성장도 한몫을 했다. 12월 2일 첫방송 된 SBS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작년 종편은 물론이고 지상파까지 포함해 가장 완성도 높은 극본 중 하나였던 JTBC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로 데뷔한 하명희 작가의 차기작이다. ‘타입슬립’을 소재로 로맨스와 서스펜스 양쪽에서 고른 긴장감을 직조해 호평 받은 tvN <나인>의 송재정 작가와 10%에 육박하는 시청률로 케이블 드라마 성공 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tvN <응답하라 1994>의 이우정 작가 역시 예능에서 큰 획을 그은 이들이지만 문법이 다른 정극에서는 신인급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태생적인 유연성에 세월의 노하우까지 더해진 케이블의 성장과 적극적인 생존 전략을 모색하는 종편의 등장이 신인 작가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낯선 이름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건 스크린에서도 마찬가지다. 올해 멜로 드라마에서 로맨틱 코미디, 범죄 느아르,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자신의 이름 석자를 각인시킨 입봉 감독들이 있다. <신세계>의 박훈정 감독은 2011년 <결투>로 입봉 했지만, 흥행에 참패해 사실상 <신세계>가 감독으로서 그의 이름을 알린 첫 작품이라 해도 무방할 듯 하다. <부당거래>와 <악마를 보았다>의 각본을 쓴 박훈정 감독은 굵직한 이야기를 힘 있게 밀고 가면서도 장르적 쾌감을 놓치지 않는 시나리오로 호평 받았다. 좋은 시나리오는 좋은 영화의 시작이자, 신인 감독에게 더 없이 든든한 지원군이니 박훈정 감독의 성공은 예견된 성과다. <감시자들>의 조의석, 김병서 감독 역시 중고 신인이라 할 수 있다. <일단 뛰어>와 <조용한 세상>을 연출한 조의석 감독은 전작의 흥행 실패 속에 절치부심했고, <호우시절>, <푸른 소금>, <위험한 관계> 등의 촬영 감독이었던 김병서 감독은 현장에서 익힌 안목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뤘다. 홍콩 영화 원작이 갖고 있는 장르성에 한국적 조직 구도와 정서를 녹여낸 <감시자들>은 특히 촬영과 편집의 완성도가 높았다. 박훈정 감독과 마찬가지로 이전의 경력이 유용하게 활용된 셈이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와 같은 날 개봉한 김병우 감독의 <더 테러 라이브>는 비록 스코어로는 비교가 어렵지만 이 영화의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올해의 데뷔작이라 해도 좋을 만큼 흥행은 물론 작품성에 대해서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더 테러 라이브> 역시 장르 영화로 분류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장점은 극도로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스릴러라는 이야기의 정체성을 한시도 잃지 않는 연출과 무엇보다 신인의 패기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결말부의 질주와 그로 인한 통쾌함에 있다. <감시자들>과 <더 테러 라이브>는 박찬호, 봉준호, 김지운 트로이카가 열어젖힌 소위 ‘웰메이드 한국영화’의 대를 잇는 작품으로도 기억될 듯하다. 이들 신인 감독에게 많은 영향과 영감을 주었음이 분명한 세 감독들이 각기 할리우드 진출과 다국적 프로젝트로 충무로를 비운 사이에 등장한 영화들이라는 점도 새삼 흥미롭다. 자고로 진정한 선배란 뒷사람이 따라올 발자국만 남기는 게 아니라 가끔은 길을 비워주는 센스도 갖춰야 하는 법이니까.
한편, <살인의 추억>을 제치고 역대 스릴러 영화 흥행 1위에 등극한 <숨바꼭질>의 허정과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들의 영광을 잇는 <잉투기>의 엄태화는 미장센 단편영화제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허정 감독은 2010년 단편 <저주의 기간>으로 ‘절대악몽’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데 이어 2013년 단편 <주희>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엄태화 감독 역시 2012년 단편 <숲>으로 ‘절대악몽’ 부문 최우수작품상과 대상을 동시에 석권한 기대주였다. <황해>의 나홍진 감독, <범죄와의 전쟁>의 윤종빈 감독, <늑대소년>의 조성희 감독 등이 거쳐간 미쟝센 단편영화제는 독립영화의 기대주들이 차세대 흥행 감독으로 성장하는데 필수적인 관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이기도 한 <잉투기>는 상업영화의 틀을 벗어난 재기 발랄함이 체계적인 교육과 선배들의 지원 속에서 어떻게 신선한 이야기로 완성되는지 보여주는 사례기도 하다. 이 외에도 아이돌 가수들의 히스토리를 닮은 다큐멘터리 <I AM.>을 비롯해 다양한 독립영화 작업을 해 온 최진성 감독의 <소녀>나 광고업계에서 일한 경력을 느끼하지 않고 ‘웃픈’ 로맨틱 코미디에 녹여낸 <남자사용설명서>의 이원석 감독, 가늘디 가늘게 이어지는 여성 감독의 명맥에 뿌듯한 연결고리가 되어 준 <연애의 온도>의 노덕 감독도 올해를 빛낸 신인 감독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낭중지추’라 했다. 언제나 하늘이 내린 재능은 있기 마련이고, 주머니를 뚫고 빠져 나온 재능은 대중을 웃고 울게 하고, 업계에 신선한 바람을 만들어 슬쩍 옆구리에 살이 붙어가던 선배들을 쿡쿡 찌른다. 하지만 첫 걸음마부터 넘어지지 않고 걷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해보면 데뷔작에 뚜렷한 인장을 새인 이 신인 작가들과 감독들의 성과를 타고난 재능과 좋은 타이밍에만 돌릴 수도 없다. 어쨌든, 분명한 건 2013년은 이들이 있어 꽤 즐거웠다는 점이다. 무명의 신인이 날린 도발적인 돌주먹에 관중은 묵직하고 짜릿한 자극을 느끼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