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는 1960년대 쇼 브라더스의 무협 영화부터 1970년대 이소룡과 성룡이 견인한 골든 하베스트의 액션 영화, 그리고 1980년대 <영웅본색>을 필두로 1990년대까지 이어진 오우삼, 서극, 왕가위의 홍콩 느와르와 홍콩 뉴웨이브까지, 오랫동안 홍콩 영화는 남자들의 유희였다. 무협과 액션, 의리와 허무에 경도된 소년과 청년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1997년 홍콩의 본토 반환을 앞두고 혼란스런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듯 홍콩 영화계는 그 기세를 잃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이 위기가 누군가에겐 기회였다. 호흡곤란을 겪던 1990년대 홍콩 영화계에 멜로드라마라는 호흡기를 선물한 인물, 그가 바로 진가신이다. 게다가 그는 조숙한 소녀와 예민한 숙녀에게 칼과 총이 없는 홍콩 영화의 재미와 당시 가장 현대적인 도시 홍콩의 풍경을 알려준 이기도 하다.
진가신은 태국 화교 출신의 부모 아래 홍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진동민 역시 영화감독이자 프로듀서였다. 미국 UCLA 영화학과에서 공부를 마치고 홍콩에 돌아온 진가신은 오우삼 감독의 작품을 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그 후 골든 하베스트에 입사하여 조감독 생활을 하다 1991년 이지위, 장지량과 함께 UFO 영화사를 설립했다. 1991년 앨런 탐과 증지위, 장만옥이 출연한 <쌍성고사>로 감독 데뷔한 진가신은 1993년 <아이니 아이워(원제: 풍진삼협)>를 통해 도시남녀의 현대적 연애 이야기를 선보였다. 뒤이어 장국영과 원영의가 주연을 맡은 남장여자 로맨틱 코미디 <금지옥엽>(1994)의 대흥행을 통해 진가신은 홍콩 영화계를 이끌 차세대 스타 감독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홍콩 최고의 가수 로즈(유가령)와 제작자 샘(장국영)을 동경하던 평범한 여자 자영(원영의)이 샘이 개최한 신인가수 오디션에 참가하기 위해 남장을 하면서 얽히는 세 남녀의 로맨스를 그린 <금지옥엽>은 경쾌하고 귀여운 홍콩 로맨틱 코미디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리고 1996년, 진가신은 자신의 경력에는 물론 1990년대 홍콩 영화계에 가장 강렬한 인장을 남긴 <첨밀밀>을 세상에 선보였다. 성공과 꿈을 찾아 홍콩으로 온 소군(여명)과 이요(장만옥)가 10년 동안 홍콩과 미국을 오가며 이어가는 애절한 러브 스토리를 그린 <첨밀밀>은 홍콩 영화 특유의 과장된 스타일을 배제하고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 농밀한 감정을 담아낸 수작이다. <첨밀밀>은 홍콩 개봉 당시 7주 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고수하고 제 16회 홍콩 금장상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최우수 감독상을 비롯해 9개 부문을 수상했다. 수많은 국내 관객들이 등려군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기억되는 ‘월량대표아적심’을 흥얼거리게 했던 <첨밀밀>은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 왕가위의 <중경삼림>과 함께 1990년대 아시아를 대표하는 멜로 영화의 지위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다.
<첨밀밀>의 성공은 진가신의 섬세한 연출력을 세계에 알렸고, 이에 그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드림웍스와 손을 잡고 <러브 레터>(1999)로 할리우드에 진출한다. 하지만 2000년대의 진가신은 할리우드에서 커리어를 이어가기보다 아시아의 다국적 프로젝트에 열정을 쏟았다. 일상적 멜로의 거장이라는 젊에서 닮은꼴로 거론되는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를 비롯해 <잔다라>와 <디 아이> 등 한국, 태국과 합작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리고 2005년, <퍼햅스 러브>로 다시 한 번 멜로 거장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금성우, 주신, 장학우가 주연을 맡아 세 남녀의 엇갈리는 사랑을 그린 뮤지컬 영화 <퍼햅스 러브>는 그가 스스로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할리우드 고전 멜로 <카사블랑카>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는 클래식한 삼각관계와 ‘보내주는 사랑’의 성숙함을 통해 <첨밀밀>과는 또 다른 진한 멜로로 완성되었다. 이후 진가신은 사실적 액션 속에 스펙터클을 담아낸 <명장>(2008)과 견자단과 왕우가 한 화면 안에서 겨루는 무협 영화인 동시에 사람이 과거를 지우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가를 묻는 심리 드라마이기도 한 <무협>(2011)을 통해 비단 멜로드라마에 한정되지 않는 섬세하면서도 힘 있는 연출력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도시적 감수성으로 홍콩 영화계에 새로운 결을 만들어냈던 진가신. 이번 ‘진가신 특별 회고전’에서 상영되는 <금지옥엽>, <첨밀밀>, <퍼햅스 러브>는 진가신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특히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일 뿐 아니라 그를 명실공히 멜로의 거장 자리에 앉힌 핵심 영화들이다. 이번 회고전은 언제 봐도 애틋한 <첨밀밀>은 물론 오래전 비디오테이프로 처음 만났던 <금지옥엽>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