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에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 밭두렁 사이를 걸어가는 교복 입은 소년을 카메라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원해지고 마음이 개운해지는 장면이다. 한편으론 울컥한 마음에 ‘인생이 쉽냐? 내가 학교생활 한 번 꼬이게 해줄까?’라며 속으로 이죽거리는 소년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카메라가 있다. 정작 꼬이고 어렵게 되는 건 그 소년의 학교생활이라는 것을 아는 터라 짐짓 입고리가 올라간다. KBS 드라마스페셜 <사춘기 메들리>를 보면서 다시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늘 학원물을 좋아했다는 것을. 청춘물이라 불러도 좋겠다. 푸를 靑, 봄 또는 움직일 春. 덜 익어서 푸르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음이 있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학교를 다녔을 뿐 학생이라 부르기 민망한 ‘꼬꼬마’ 시절에는 조숙한 동경을 품었던 것 같고, 교복을 입기 시작했을 때는 평범한 나의 일상과 달리 특별한 TV나 영화 속 학교가 신기했던 것 같다. 더 이상 귀밑 2cm 단발머리를 강요받지 않게 된 뒤로는 주로 애틋한 마음을 품으며 봤던 것 같다. 추억이나 그리움과는 좀 다른, 안타까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 시절을 졸업한다고 해서 더 나은 날이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어서, 더 나을 것 없는 그 세상을 공고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부채감도 있었다.
적어도 TV 드라마의 장르로서 학원물의 힘은 한동안 그리 크지 않았다. 성장, 첫사랑, 우정, 성(性)적 호기심, 입시와 현실 비판 등 다양한 결을 품을 수 있는 학원물은 로맨스부터 코미디, 공포물까지 다양한 장르와 혼합 변종될 수 있다. 하지만 보편적인 대중을 타깃으로 삼기 어려워 여름이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공포물처럼 학생들의 방학 특수를 노리며 기획되어 딱 그 정도의 목표에 맞는 결과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2011년 KBS 드라마 스페셜 연작시리즈 <화이트 크리스마스>나 지난 해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방송된 KBS 미니시리즈 <학교 2013> 같은 작품들은 좀 다른 마음을 품었던 작품들이었다. 장르적 야심일 수도 있고 외면할 수 없는 안타까움일 수도 있는 마음 말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공포물의 가장 흔한 배경이 되는 학교 자체를 공포의 근원으로 설정한 심리 추리극이다. 박연선 작가 스스로는 <10 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학원물도 성장물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고등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파워와 에너지와 갈등이 제일 재미있고 섹시하다”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학원물이라는 장르가 먼저가 아니라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와 인물에 적합한 장소로 학교가 선택되었다. 한편, <학교 2013>은 KBS <학교> 시리즈의 이름을 빌어 왔지만 방점은 ‘2013’ 쪽에 찍힌다. 이현주 작가가 이 작품을 쓴 동력 중에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아파서도 있었다. 물론 대한민국의 10대가 입시와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싶다. 하지만 자생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공교육과 계급과 소득 수준에 종속되는 사교육 사이에서 점점 더 일찍 포기와 좌절를 배우는 지금의 학생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작가의 마음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겼다.
<사춘기 메들리>의 정우(곽동연)와 <학교 2013>의 남순(이종석)은 있는 듯 없는 듯 교실을 메우는 학생이다. 정우가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열 세 번의 전학을 경험하며 친구들과 거리 두는 것에 익숙해졌다면, 남순은 과거의 잘못으로 스스로를 유배한 경우였다. 정우는 다시 전학을 앞두고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사고를 친다. 이름을 모를 정도로 관심 없던 짝 덕원(곽정욱)을 괴롭히는 선배 영복(박정민)에게 대들고, 좋아하지도 않는 반장 아영(이세영)을 곤란하게 만들 마음으로 사귀자고 고백한다. 심지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전국노래자랑>에 학교 대표로 나가겠다고 자원하기까지 한다.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된 건 빤한 수순이다. 남순 역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정호(곽정욱)에 의해 얼떨결에 학급 회장이 되면서, 학교에서 엎드려 자는 것 외의 일을 경험하며 비로소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된다.
다만 <사춘기 메들리>를 보는 마음은 <학교 2013> 때처럼 조마조마하지 않다. 물론 아버지가 전근을 포기하면서 전학을 갈 수 없게 된 정우의 앞날이 위태롭지 않은 건 아니다. 인생이 정우에게 ‘뒤에서 무릎꺾기’를 시전하신 탓에 교실 의자는 말 그대로 가시방석이 되었고 다크 서클은 무릎까지 내려올 기세다. 하지만 <전국노래자랑>에 나갈 젊은 사람을 차출해야 하는 시골의 고등학교에 다니는 정우와 친구들의 좌충우돌은 어쩐지 안전한 기분이 든다. 게다가 이들은 ‘가로본능 폰’을 쓰는 10년 전의 아이들이니 말이다. 올드 팝 ‘only you’와 장나라의 ‘Sweet Dream’이 흘러나오는 <사춘기 메들리>의 세계는 과하게 뽀얀 화면이 오히려 어색한 방해로 느껴질 만큼 풋풋하고 그래서 귀엽다. 시골이라서, 과거라서 학생들이 지금보다 덜 불행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사춘기 메들리>가 선택한 이 시공간이 어느 정도 보호막의 역할을 하고, 그 덕에 이 드라마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나 <학교 2013>의 도발이나 공감을 성취할 순 없어도 지극히 ‘평범한’ 학생들의 잠시 독특했던 한 때를 맑게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웃는 학생들을 보며 실실 웃는 기분이, 생각보다 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