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45년산 거목이 있다. 그 끝을 올려다보려면 목을 한참 뒤로 꺾어야 할 만큼 큰 몸통은 사뭇 위압적이지만, 왠지 무섭지 않다. 바닥에 굳게 내린 뿌리는 그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도 와서 기대어도 받아줄 것 같고, 사방으로 넓게 드리운 가지가 만드는 그늘의 품은 누구라도 쉬어갈 수 있을 만큼 아늑하다. 심지어 위급한 순간에는 강철합금 무기라도 뽑아 들고 막아줄 것 같다. 휴 잭맨이라는 이름의 이 거목은 강인하고 든든하다.
‘맨 중의 맨’이라는 더없이 적확한 수사가 말해주듯, 배우 휴 잭맨에게 가장 어울리는 옷은 마음 편히 의지해도 좋을 영웅의 모습이다. 당연히 <엑스맨> 시리즈 속 울버린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휴 잭맨은 오랫동안 울버린이었고 <더 울버린>의 개봉을 앞둔 지금 여전히 울버린이다. 지금은 코믹스 원작에서 차출된 히어로가 없으면 할리우드가 휘청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시절이다. 하지만 지난 2000년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엑스맨>이 개봉할 당시는 휴 잭맨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성공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할리우드에서 막강한 어떤 사람이 저에게 <엑스맨>이 개봉하기 전에 다른 영화를 계약해두라고 말해줬어요.”라고 휴 잭맨이 밝혔듯이 호주 출신인 그가 미국에서 처음 찍은 영화인 <엑스맨>은 이후 커리어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중대하고 위험한 선택이었다.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대성공이었다. 온 몸의 뼈가 파괴 불능의 아만다티움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정체에 혼란을 겪으며 방랑자처럼 여기저기를 떠도는 돌연변이, 사랑하는 사람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스스로는 죽지도 못 하는 가혹한 운명 속에 살아가는 이 불멸의 존재에 전 세계 사람들이 마음을 주었다.
190cm에 가까운 장신에 하루 6,000kcal 식단과 강도 높은 운동으로 만든 고밀도의 근육은 액션 스타로서 휴 잭맨의 가능성을 발화시킨 1차 조건이었다. 그래서 십 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엑스맨> 시리즈뿐만 아니라 울버린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기억을 잃은 채 로마 교황청의 명을 받아 드라큘라를 처단하는 신의 사제로 변신한 <반 헬싱> 시리즈는 물론, 광활한 대륙을 달리는 소몰이꾼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와 전직 복싱 선수였던 <리얼 스틸>에 이르기까지, 휴 잭맨의 필모그래피에서 육체의 전시를 빼놓을 수 없는 역할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하지만 휴 잭맨이 액션 히어로나 마초를 연기하는데 있어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압도적인 근육 안에 더욱 단단하게 자리 잡은 선량한 의지였다. 앞서 언급한 캐릭터들이 과거에 큰 상처를 안고 있고 그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에 회의적이거나 무책임한 생활로 인생을 낭비하거나 아예 기억 속에 과거를 봉인하고 마음을 닫은 채 살아가다가도, 끝내는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들을 어려움으로부터 구하는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레 미제라블>은 이 선량한 의지라고 하는 배우 휴 잭맨의 진짜 재능이 최대치로 폭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캐스팅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다. 그가 호주에서 뮤지컬 무대로 경력을 쌓았고 2004년에는 뮤지컬 <오즈에서 온 소년>으로 토니상 뮤지컬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적 있을 만큼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 휴 잭맨은 울버린으로 각인된 근육질의 액션 배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디션을 자청하고 톰 후퍼 감독 앞에 선 휴 잭맨과 그 모습에서 장발장의 현현(顯現)을 목격한 감독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이 변신의 첫 단추 역시 시작은 몸이었다. 수 개월간 탄수화물을 먹지 않고 촬영 36시간 전에는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는 노력으로 휴 잭맨은 울버린의 무적 근육 대신 장발장의 움푹 파인 볼과 퀭한 눈을 얻었다. <레 미제라블>의 첫 장면에서 세찬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노역을 하는 장발장이 등장하는 순간, 더 이상 울버린은 없었다.
하지만 휴 잭맨의 장발장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켜쥘 수 있었던 건, 스스로의 의지로 초인이 된 사내 장발장의 너른 품이 휴 잭맨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가혹한 운명 앞에서 인간은 자주 스스로도 지키기 힘든 상태가 되지만 어떤 사람은 놀라운 의지로 신의 시험과 맞서고, 잔인한 운명의 비바람 속에서 주위 사람을 구원하는 우산이 되어준다. 아들을 위해 낡은 로봇과 더 정확하게는 외면해 왔던 과거의 자신과 마주 서서 잽을 날리던 <리얼 스틸>, 차별 받는 원주민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폭격 속에 몸을 던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그랬듯이, 어린 코제트의 손을 잡아 그를 비참한 삶에서 구해주고 혁명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청년들과 함께 총을 드는 장발장의 마음은, 불멸의 고전인 원작 소설에 이미 존재하는 심성인 동시에 휴 잭맨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우리가 직접 목격하거나 전해들은 그의 실제 삶이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근무했던 인연으로 호감을 갖고 있어 자주 한국을 방문하는 휴 잭맨은 공식석상에서는 물론 짓궂은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언제나 주위를 온화하게 만드는 젠틀맨이다. 호주의 무명 배우였던 시절이나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할리우드의 대스타가 된 지금이나 변함없이 신실한 남편이자 다정한 아버지인 모습은 “배우가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게 그 사람 안에 있는 마음이다. 심성이랄까. 그런데 휴 잭맨은 정말 타고난 고운 심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장 발장을 잘 연기해준 것이다.”라는 카메론 메킨토시(<레 미제라블> 제작자)의 말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물론, 좀처럼 흠을 잡기 어려운 성실한 면모가 심심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울버린의 대성공이라는 그늘에 어쩔 수 없이 가려졌지만 휴 잭맨도 다양한 얼굴을 가진 배우다. 바람둥이 휴 잭맨이 궁금하면 <썸 원 라이크 유>를,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어리바리한 휴 잭맨을 보고 싶다면 <케이트 앤 레오폴드>를 권한다. 실연으로 힘들어하는 룸메이트의 신경을 톡톡 건드리다 자신도 모르는 새 사랑에 빠지는 바람둥이 에디와 19세기 영국에서 21세기 미국으로 타임 슬립 한 뒤 세상물정 모르고 좌충우돌 하고 낯간지러운 사랑 시를 읊는 레오폴드는 울버린의 근육 속에 묻어두기엔 너무 아까운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타인의 동경을 사고 그 마음을 이용해 인생을 빼앗는 사기꾼 와이어트로 분한 <더 클럽>에서는 휴 잭맨의 음험한 매력을 만날 수 있다. 또 한 명의 고독한 히어로 크리스찬 베일과 숙명의 라이벌로 만나는 <프레스티지>에서는 궁극의 마술을 위해 참혹한 희생을 감수하는 마술사 집착을 섬세한 표정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휴 잭맨에게 가장 기대하는 모습은 뾰족한 강철 무기를 가슴 앞에 교차하고 악당을 막아선 울버린이나 다친 마리우스를 어깨에 둘러메고 하수구를 빠져나온 장발장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휴 잭맨의 잘 단련된 승모근과 흔들림 없지만 한없이 따듯한 눈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이 경구가 떠오르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맨 중의 맨’이라는 아름다운 헌사에 부여된 숙명이라도, 그는 기꺼이 감당해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