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을 새삼 실감했다. SBS <세 번 결혼하는 여자> 5, 6회를 보면서 잠시나마 김수현 작가를 의심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십 수 년의 세월을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와 함께 한 자타공인 팬임을 먼저 밝힌다. 그런데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지금까지는 첫 회만 ‘역시 김수현 작가님이셔!’ 라며 변함없이 대단한 필력에 감탄하는 수순이었건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주인공 은수(이지아)가 가장 큰 이유였다. 사실 이 역할 때문에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방송 전부터 말이 많았다. 한가인부터 김사랑, 그리고 최종 결정된 이지아에 이르기까지 여러 배우들이 캐스팅 물망에 오르내리느라 제작이 지연되었고, 결국 방송은 예정일을 넘겨 시작되었다. 방송을 보고 나니 은수 캐릭터가 캐스팅이 쉽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뭐랄까, 첫인상이 좋지 않은 인물이라고 할까. 이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의 초반 시청률은 김수현 작가의 이름값에 미치지 못 했고, 당연하게도 김수현 위기론을 성급하게 거론하는 기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클래스의 힘은 금세 드러났다. 흥미로운 건 반전의 계기 또한 바로 은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라는 도발적인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은수는 평범하지 않은 캐릭터다. 첫 결혼에서 낳은 아이를 친정 부모에게 맡기고 두 번째 결혼 생활을 막 시작한 미모의 여자. 결혼 생활을 힘들어하는 은수를 위해 이혼에 동의한 전 남편 태원(송창의)은 여전히 은수를 염려하는 착한 남자고 두 사람은 아이를 사이에 두고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두 번째 남편 준구(하석진)와의 신혼 생활도 좋다. 그래서 지금 은수는 행복해 보인다. 문제는 ‘지나치게’ 행복해 보인다는 데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혼을 하며 은수는 딸 슬기(김지영)를 친정 부모에게 맡겼다. 새로운 시부모가 아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엄마와 떨어져 살게 된 슬기는 학교에서 고아라고 놀림 받는 상황까지 더해지자 힘들어한다. 결국, 지금 은수는 언뜻 보기에 자식 떼어놓고 재가해서는 저 혼자 행복한 여자 같다. 여기서 시청자의 위화감이 발생한다. 은수의 언니 현수(엄지원)의 말을 빌려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일종의 “바람난” 여자를 보는 시선이랄까. 이 때, 은수가 부도덕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은수의 부모가 손녀를 살뜰하게 챙기며 키우고 있다는 상황들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다. 그저 아빠와 살겠다는 딸을 막는 은수의 이기심만 부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5, 6회에서 왜 은수가 그토록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지 슬기를 예전 시댁에 보낼 수 없는지 이유가 밝혀졌고, 그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김수현 작가라면 당연한 것인데 믿음이 부족한 신자라 잠시 의심했던 걸 반성했다. 은수는 예전 시댁에서 참기 어려운 모멸감을 견뎌야 했다. 시어머니와 결혼하지 않은 시누이는 평범한 집안 출신에 쇼 호스트였던 은수가 성에 차지 않았지만 아들 태원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태원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은수에게 인격적인 모욕을 서슴지 않았고, 태원 앞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낯으로 대했다. 결국 위자료도 없이 슬기만 데리고 나와 이혼한 은수로서는 딸이 그 집안에서 어떻게 자랄지 걱정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재혼한 남편 준구는 2년 뒤 분가 해 슬기를 데려와 살자고 약속했다. 은수는 그 약속을 믿고 새 시댁에서 자리 잡기 위해 웃는 얼굴로 애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약속은 공수표였다. 새로운 시부모님이 용납하지 않고 준구는 부모님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김수현 작가의 장기 중 하나인 도발적인 치정극이 될 듯하다. 김수현 작가의 작품 세계는 거칠게 말해 치정극과 가족극으로 나눌 수 있다. 방송 시간이면 전국의 수돗물 사용량이 확 줄어들었다는 7, 80년대 전성기 시절은 물론 가까운 최근만 해도 배신과 불륜을 밑바닥에 깔고 뜨거운 치정을 그린 멜로드라마 SBS <청춘의 덫>, <불꽃>, <내 남자의 여자> 등과 KBS <부모님 전상서>, <엄마가 뿔났다>, SBS <인생은 아름다워>, JTBC <무자식 상팔자> 등과 같이 보수적 형태의 대가족극이 김수현 작가의 필모그래피를 양분한다. 중요한 것은 이 대작가가 양쪽 모두에서 던지는 도발적인 질문에 있다. 재혼 가정, 동성애자, 미혼모 등을 적극적으로 다룬 전작들이 가장 대표적이지만 이렇게 전면에 드러나는 설정이 아니라도 그는 언제나 금기를 건드리는 질문을 통해 인간 본연의 욕망과 딜레마를 이야기하는 작가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서도 표면적으로 가장 큰 화두는 결혼 자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중 하나이자 인생의 큰 전환점인 결혼을 두고 각기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내린 선택과 그것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큰 줄기다. 결혼과 샴쌍둥이처럼 등을 맞댄 이혼과 재혼을 둘러 싼 변화된 혹은 여전히 그대로인 세태와 인식도 중요하다. 그리고 여기에 김수현 작가의 질문이 더해진다. 엄마이자 여자인 한 사람의 선택을 통해 엄마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의 삶을 온전히 포기해야 하는가 라는. 은수의 딸은 엄마가 자신을 두고 결혼하면서 함께 살 수 없어졌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삶을 택한 엄마가 행복해 보인다는 점에 상처를 받았다. 은수의 주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은수가 불행하고 고통스러웠던 첫 번째 결혼을 이혼으로 끝냈다는 점을 가여워한다. 하지만 다시 재력가의 남자와 새로운 결혼을 하면서 아이를 떼어놓고 갔다는 것을 두고 무언의 비난을 한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수히 많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치정극이든 가족극이든, 자극적이든 보수적이든,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속 인물들은 흥미롭고 살아있다. 친구의 남편과 불륜에 빠지거나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도 약혼자가 있는 남자와 결혼을 감행하는 여자들도, 믿었던 딸이 미혼모가 된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어머니도,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힘겹게 인정하지만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 하는 아버지도 모두 자신의 삶을 살며 살아있다. 그들이 웃고 울고 또 주위 사람을 웃기고 울리는 모습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연 많은 우리네 인생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하고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의 은수를 지켜보는 것이 흥미로워졌다. 또 하나의 인생을 더 이해하고 배울 수 있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