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요?” 얼마 전 지인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이렇게 물었다. 살기가 왜 이렇게 팍팍하고 정치는 왜 이렇게 터무니없고 정의나 원칙 같은 말을 입에 담는 게 어쩐지 멋쩍어진 것이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물론 하루아침에 나빠지는 세상이라는 게 있을 리 만무하다. 부패의 씨앗은 우리의 본성에 숨어 있었을 것이며 하루하루의 무관심 위에 서서히 썩어왔을 것이며 가속 페달을 밟게 한 치명적인 계기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 때 머릿속에 무심코 떠오른 것은 ‘97년 체제’였다. 막 삼십대가 된 우리에게는 물론 대한민국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데에 1990년대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동갑인 나와 지인은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고등학생이 되었고, 부모님의 구조조정과 함께 등록금을 걱정하며 대학을 다녔으며, ‘이태백’이 신조어가 된 시기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80년대에 우리는 태어나긴 했지만 수동적으로 키워지는 시기였고 1990년대는 우리가 세상과 나의 관계를 비로소 주체적으로 자각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우리는 지난해 대중문화계 최고의 화제 중 하나였던 tvN <응답하라 1997>와 영화 <건축학개론>이 소환했듯이 대중문화산업이 무한성장 하던 풍요로운 시절에 10대를 보냈지만, 한편으로 1990년대는 ‘무한 경쟁’이 본격적인 시대의 이념이 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래서 우리에게 1990년대는 부모님 세대에게 ‘7080’이 갖는 의미가 그렇듯이 양가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1990년대를 다루는 것에 있어 단순히 ‘추억 팔이’ 식의 복고와 미화만이 아닌 냉정한 분석과 뼈저린 반성으로도 기록하고 기억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최근 방송을 시작한 SBS 월화드라마 <황금의 제국>을 기다린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물론 지난해 시청률과 작품성에서 모두 좋은 성과를 낸 SBS <추적자 THE CHASER>의 박경수 작가와 조남국 감독이 또 한 번 손을 잡았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황금의 제국>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1990년대 후일담 드라마’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황금의 제국>은 1990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 경제사 격동의 20년을 무대로 삼는다. ‘우리 모두의 부끄러웠던 지난 20년’을 ‘시대의 세밀화’로 그려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드라마의 첫 시퀀스에서 주인공 태주(고수)는 자신을 위협하는 국회의원을 매수하려다 실패하고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국회의원을 칼로 찌른 그 순간 태주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 지 알 수 없는, 영혼을 잃은 텅 빈 눈이었다. 하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은 그의 눈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 지 정확히 알고 있는 자의 확신을 보여주었다. 바로 그 눈빛과 표정이 1990년대를 관통하며 일종의 체질 개선을 하고 2000년대를 맞은 이 나라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는 곧 1990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당시 명문대 법대생이자 사법고시 2차 시험을 앞둔 태주를 보여준다. 태주의 아버지 봉호(남일우)는 30년 동안 리어카를 끌어 겨우 밀면 가게 하나를 마련했지만 신도시 개발과 그로 인한 상가철거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날 처지다. 결국 봉호는 철거용역 깡패들과의 대치 중 화재 사고로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보상금을 받지 못 한 태주는 수술비 3,000만 원을 마련할 방법이 없다. 충분한 보상금과 책임자의 사과를 요구하며 버티는 대책위원회 사람들 앞에서 태주는 이렇게 외친다. “책임자? 전 국민이 책임자야. 돈 생기면 땅 사고 대출 받아 건물 사고 없는 놈들 몰아내고 지 뱃속 채운 놈들 전부 다 책임자야. 당신들도 똑같잖아. 돈 생기면 땅 사잖아. 없어서 못 샀잖아. 뭐가 억울한데? 억울하면 돈 벌어. 땅 사.” 당장 보상금을 받지 못 하면 아버지가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터져 나온 울분이지만 그렇다고 어쩔 수 없는 위악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추적자 THE CHASER>의 홍석(손현주)과 태주의 차이점인 동시에 두 작품의 차이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태주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하고 정직한 인물이었지만 아버지의 부당한 죽음으로 검은 욕망에 눈을 뜬 인물이라고 변명할 수 없다. “착한 사람 필요 없어. 정직한 사람 구역질 나. 지금 나한텐 이런 사람이 필요해.” 자신을 이용하려는 설희(장신영)의 속셈을 빤히 알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그 손을 잡기를 망설이지 않는 태주는 그저 억울한 희생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신도시 개발을 시작으로 앞으로 <황금의 제국>이 그려나갈 IMF 외환위기와 구조조정, 그로 인한 중산층 몰락, 벤처 열풍과 거품의 붕괴, 금융 자본과 신자유주의 전면화, 부동산 광풍과 같은 1990년대의 초상은 소위 ‘97년 체제’라고 말하는 시대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휩쓸려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태주 아버지처럼 하루아침에 권리금과 초기 투자비용을 다 잃고 맨손으로 쫓겨난 억울한 서민들이 없었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신도시 건설과 재개발, 그린벨트 해제로 큰돈을 손에 쥐는 이웃을 부러워하고, 내게도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고, 실제로 기회가 왔을 때 주저하지 않았던 “보통 사람”이었다.
앞으로 태주는 설희와 함께 부동산 시행사를 운영하며 경제와 부동산이 미친 듯이 팽창하던 1990년대의 한복판을 달릴 것이다. 돈이 돈을 벌고, 양심적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바보라고 비웃음 당하던 시절을 지나 태주가 결국 손에 피를 묻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이 나라에서 보편적 가치가 약화되고 결국 사라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황금의 제국>의 또 다른 축인 재벌가 권력다툼의 주인공 민재(손현주)는 “신도시가 만들어지면 황무지는 사라질 거니까요” 라고 말했다. 사라진 것은 황무지만이 아니다. 파헤쳐지는 땅과 무너져 내리는 건물과 함께 염치도 사라졌다. 그리고 이후 20년 간 ‘몰염치’와 ‘물질만능’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1990년대는 <응답하라 1997> 속 아련한 추억으로만 회고되어서는 안 되는, 현재진행형의 후일담이다. 과연 <황금의 제국>은 이 시절의 욕망을 얼마나 생생하게 담아내고 또 얼마나 통렬하게 반성할 수 있을까. <추적자 THE CHASER> 팀이기에 또 한 번 기대를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