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서 나를 보게 되는가. 이것은 내가 어떤 드라마를 끝까지 보거나 상대적으로 더욱 몰입해서 보는 이유 중 하나다. 4월에 새로 시작한 지상파 3사의 월화 드라마를 보면서도 마찬가지다. 한 주 먼저 방송을 시작한 KBS <직장의 신>부터 같은 날 방송을 시작한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이하 <장옥정>)와 MBC <구가의 서>까지 세 작품은 장르와 이야기는 물론 배우들의 캐릭터 소화력까지 각기 다르다. 하지만 묘한 공통점 때문에 본방 사수와 재방송, 다시보기를 총동원해 챙겨 보게 되었다. 희대의 요부이자 악녀의 대명사인 장희빈에 대한 재해석을 천명한 <장옥정>과 반인반수의 주인공을 내세우고 판타지 사극을 표방하는 <구가의 서>, 그리고 일본 드라마 <파격의 품격>을 원작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800만 시대”의 초상을 그리겠다는 <직장의 신>. 막 뚜껑을 연 각기 다른 드라마들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들리는 것은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고자 욕망하는 인물들의 거친 숨소리다.
사극의 외피를 입은 <장옥정>과 <구가의 서>는 장르의 특성상 신분과 계급의 차이가 인물의 성격과 갈등을 만드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장희빈을 궁중 암투의 한복판에서 온갖 패악을 서슴지 않은 사악한 여인이 아니라 뛰어난 실력으로 타고난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던 인물로 조명하는 <장옥정>은 지난 1, 2회에서 역관 아비와 노비 어미 사이에서 태어난 천출로서의 장옥정(김태희)에 대해 공들여 묘사했다. 지리산을 지키는 신수 구월령(최진혁)과 역모의 누명을 쓴 아비로 인해 하루아침에 관기가 된 서화(이연희)의 운명적인 사랑으로 문을 연 <구가의 서>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구월령의 욕망과 이를 상상하지도 용인하지도 못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극을 잉태했다. 앞으로 펼쳐질 본격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인 최강치(이승기)가 반인반수이고 그 역시 인간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점이 갈등의 주요 요소로 작용할 예정이다.
비단 타이틀 롤을 맡은 인물들만이 아니다. 초반 <장옥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보여준 장옥정의 당숙 장현(성동일)과 이후 숙종이 될 세자 이순(유아인) 역시 마찬가지다. 조선 최고의 갑부로 막대한 재물을 모았지만 반상의 구별에 의해 양반 민유중(이효정)에게 치욕을 당하는 장현의 분노와 야망, 그리고 복수심이 장옥정을 역사의 한복판에 밀어 넣는다.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놀아난 우유부단한 왕이 아니라 조선을 신하의 나라라 믿는 조정 대신들과 대립하며 절대왕정을 세우고자 하는 인물로 그려질 이순도 비록 왕세자지만 권력과 권위도 없는 지금의 처지가 아닌 강한 왕권을 욕망한다. 친구에게 역모의 누명을 씌우고 그 딸을 취하고자 한 <구가의 서>의 조관웅(이성재) 역시 무과를 통과한 무관이지만 통인의 아들이라는 신분의 굴레가 입신양명과 재물을 탐하는 그의 비뚤어진 야심의 씨앗이었음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현대극인 <직장의 신>에서는 하늘이 내린 신분이 아닌 회사가 내린 ‘증’에서 갈등이 시작된다. 자랑스러운 사원증을 목에 걸고 회사에 죽고 회사에 살고 회사 동료들에게 “내일 보자”라고 말 하는 게 행복인 정규직 팀장 장규직(오지호)에게 “어디서 굴러들어 온 계약직 따위”는 동료는커녕 때로 사람도 아니다. 한편 출입증을 목에 걸고 일하는 정주리(정유미)는 성차별적 발언을 비롯해 일상적인 부당 대우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계약직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국내 최초 자발적 비정규직” 미스김(김혜수)이 있다. 일반 사무는 물론 ‘같은 커피 다른 맛’의 능력부터 중장비를 운전하고 다양한 인맥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 고기도 잘 굽고 ‘소맥’도 잘 말고 탬버린도 잘 치는 미스김. 일반인들이 상상하기도 흉내 내기도 어려운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 미스김의 존재는 정규직 장규직과 비정규직 정주리가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재검토하게 한다.
이 드라마들을 보고 있는 우리는 어떤가.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누구를 동경 혹은 동정하고 누구를 연민하고 미워하는가는 드라마를 보는 가장 큰 재미다. 그래서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 역시 시청자의 욕망이다. 이를 읽어내 극중 인물들의 욕망으로 그려내고 뛰어난 작품들은 그 속에 시대의 욕망까지 품어내기도 한다. 물론 기획 의도나 등장인물 소개와 다르게 전개되고 겉을 싼 포장지는 달라도 결국에는 로맨스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우리나라 드라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물과 사건, 갈등의 결에 당대의 욕망이 새겨져 있고 그걸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새로 시작한 월화 드라마에서 신분이든 계층이든 운명이든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나를 꿈꾸며 현재의 나를 옭아맨 굴레와 투쟁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흥미롭다. 물론 인물들이 뛰어난 미모는 물론 그저 한 번 보았을 뿐인데도 수의를 뚝딱 지어내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거나 124개의 자격증과 주위 사람들의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는 강철 ‘멘탈’을 지닌 이들이기에 몰입이 어려운 순간도 많다. 신분을 뛰어넘으려면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 역시 하늘에서 내리거나 지금 처한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유효기간의 끝의 향해가고 있는 시대, 개인의 역량이 넓은 의미의 ‘자본’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이 더욱 명확해지는 시대에 신분은 불평등하고 재능은 공평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막 시작한 세 드라마들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 그 속에서 내가 기대하는 질문과 답을 찾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장옥정>이 그리는 새로운 역사 속에서 신분을 뛰어넘으려는 욕망은 그저 애절한 로맨스를 위한 장치로 희생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네하고 인간 사이엔 분명한 경계가 있다는 걸 명심하시게.”, “누굴 탓하겠냐. 이게 다 니 년의 박복한 팔자 탓인 것을.”, “죽든 살든 저 여인의 운명이고 팔자야.” 등 여러 인물들의 입을 통해 정해진 운명을 개인이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야기한 <구가의 서>는 “내 운명이 뭔데? 난 인정 못 해. 어느 것도 내 운명으로 인정 안 할 거야.”라던 서화의 외침을 얼마나 긍정할 수 있을까. 사회와 조직의 일원이자 다양한 입장의 ‘을’로서 매일 힘겨운 전투를 벌이는 시청자에게 <직장의 신>의 도발적인 설정은 얼마나 현실적인 이야기와 영혼 있는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은 이들 드라마 속에서 욕망의 숨소리가 들리고 그것이 흥미롭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월화의 밤을 밖에서 배회하지 않을 이유는 되는 듯하다.